프롤로그
내 평생 잊지 못할 일: 농부의 길 대신...
학교 연구실에서 밤늦게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아버님이 보낸 편지를 내밀었다. 조금 흘려 쓴 편지에는 “···내가 이제 눈도 어둡고 농사일이 너무 힘들구나. 네가 돌아와서 농장을 맡아 주어야겠
다···.”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. 어떤 일이 있어도 약한 말씀을 한 적이 없는 아버님이 박사 과정에 입학하고 싶다는 나의 편지를 보고 호소하듯 쓴 편지였다.
아버지는 서울 근교에서 제일 먼저 비닐 온실 농사를 시작했고 일본 농업서적을 구해 밤마다 탐독한 선진 농사꾼이었다. 아버지의 꿈은 나를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농사꾼으로 만드는 것이었고, 그래서 최신 농법을 배워 오라며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.
일본에 온 후 처음에는 농장 견학 등에 열을 올렸으나 어느새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보다 농업경제학 공부에 빠져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했던 것이다.
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. 집 안마당에 들어서자 아버님은 “이제 왔구나” 한 마디만을 하시고 얼른 뒤로 돌아서셨다. 내가 대학생 시절 혼자 한 달 간 전국을 여행하고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···.
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공부하려는 아이를 불러들였다고 핀잔하셨고 집안 식구도 아버지에게 “농사일을 이어받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? 박사 공부를 하게 해야 한다”고 거들었다. 얼마 후 아버님은 “그래 공부를 끝내거라. 농장은 내가 몇 년 더 돌보마.”라고 쓸쓸히 말씀하셨다.
그러나 아버지는 곧 심한 기침 끝에 폐암 진단을 받았고 내가 귀국한 지 겨우 다섯 달 만에 “무슨 병이냐”고 한번 묻지 않고, 또 괴롭다는 호소 한 번 없이 숨을 거두셨다.
나는 아버지 산소의 땅이 굳기도 전에 어머니에게 떠밀려 다시 일본으로 향했고,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농장으로 키워주기를 기대했던 그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.
지금도 아버님의 마지막 편지와 “이제 왔구나”며 돌아서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. 그리고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빈다.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.
“나의 아버지와 같이 농토를 사랑하며 농사일을 자랑스러워하며 자기의 뒤를 이어 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들이 지금 농촌에 얼마나 있을까.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소망대로 모두
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.”
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주장했노라고
얼마 전 어느 출판사에서 「다시 읽는 명칼럼」이란 책에 내가 어떤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게재하겠다고 동의를 구해 왔다. 내 글이 무슨 명칼럼이 될까마는 대입 논술시험용 참고서를 만들면서 농업관련 주제도 하나쯤 넣으려다 우연히 내 글을 본 것 같았다. 아무튼 나쁘지 않은 일이라 흔쾌히 동의서를 써 보냈다. 그런 용도라면 모를까, 신문·잡지 등에 게재되었던 때 지난 글을 다시 모아 책을 만든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? 이 책을 준비하기 전 나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.
한국 농업은 세계 어느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산업화와 개방화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왔고 최근 수년간 DDA 협상 공방, 쌀 협상논란, 한·미 FTA 협상 갈등 등 회오리의 정점을 지나고 있다. 농업
인들은 격렬한 시위로 개방과 농정에 저항했고, 농업과 농업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그만큼 높아졌다.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책담당자들은 물론 농업인단체, 학자, 언론은 한국 농업이 가야 할 길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였고, 한국 농업은 여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무림치며 변해 왔다.
나는 문득 후일 사람들이 이 격변의 시대에 살았던 농업문제 전문가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주장을 했느냐고 따질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. 그리고 이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내가 생각하고 주장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. 기록인 만큼 과거에 썼던 글 중 어법과 맞춤법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하였으나 내용은 당초의 것을 그대로 싣기로 했다.
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기록을 넘어 사람들이 농업문제의 깊은 속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농정 방향을 논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. 농업문제와 농정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고 그것이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.
기회 있을 때마다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농민신문을 비롯한 각 신문사에 깊이 감사드린다.
차례
프롤로그
농업의 존재 의미
한국 농업의 길
한국 농정의 길
글로벌 통상국가와 농업
타산지석 외국 농업·농정
쌀, 어떻게 할 것인가
축산, 어떻게 할 것인가
농산물 물가 논란 오해와 진실
범하기 쉬운 오류들
에필로그